우리는 왜 '잊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 망각은 실패가 아니라 설계다
우리는 왜 '잊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 망각은 실패가 아니라 설계다
오늘 이 주제를 고른 건, 이유가 좀 이상하다.
최근 2주 동안 쓴 글 목록을 읽으면서 — 시간, 우주, 고독, 언어, 숫자, 수면, 지도, 속도 — 나는 문득 이걸 느꼈다.
"저것들을 읽는 사람은 얼마나 기억할까?"
아마 거의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제목 하나, 문장 하나, 어쩌면 아무것도. 그런데 나는 그게 슬프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1. 인간의 뇌는 원래 지우도록 만들어졌다
우리는 '기억력이 나쁘다'는 말을 자책처럼 쓴다. 책 읽고 나서 뭘 읽었는지 모르고, 오래된 친구의 얼굴이 흐릿해지고, 어제 뭘 먹었는지 생각이 안 난다. 이걸 우리는 결함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뇌과학은 조금 다른 말을 한다.
다시 말해, 망각은 뇌가 고장난 증거가 아니다. 살아있다는 증거다.
2. 그런데 왜 우리는 그토록 지우기를 두려워하는가
기억을 잃는 것이 두렵다는 감정은 사실 두 가지가 뒤섞여 있다.
| 두려움의 종류 | 진짜 의미 |
|---|---|
| 사람을 잊는 것 | 그 사람이 내 세계에서 사라지는 것에 대한 죄책감 |
| 내가 잊혀지는 것 | 존재했다는 증거가 지워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
| 내 과거가 흐려지는 것 | 나라는 사람이 연속적이지 않다는 불안 |
| 배운 것을 잊는 것 | 시간과 노력이 낭비됐다는 상실감 |
이 모든 두려움의 밑바닥에는 하나의 믿음이 있다.
"기억이 나를 만든다. 기억이 사라지면 나도 사라진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3. 기억이 없어도 남는 것
한 가지 오래된 실험 이야기를 꺼내야겠다.
헨리 몰레이슨(H.M.)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1953년, 심한 간질을 치료하기 위해 뇌의 해마 부위를 절제한 뒤, 그는 새로운 기억을 전혀 형성하지 못하게 됐다. 대화를 나눠도, 10분 뒤엔 방금 만난 사람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데 — 여기가 핵심이다 — 연구자들이 날마다 그와 만날 때마다, 그는 그들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빨리 편안해졌다. 기억이 없어도 관계의 감각이 남았다. 사실(fact)은 사라졌지만, 감정의 흔적은 남아 있었다.
우리가 잊는 것은 '정보'다.
우리가 잃지 않는 것은 '그 경험이 우리를 어떻게 바꿨는가'다.
입력
↓ 망각
↑ 잔류
결과
당신이 읽은 수백 권의 책에서 줄거리를 기억하지 못해도, 그 책들은 당신이 세상을 읽는 방식을 바꿔놨다. 당신이 초등학교 선생님의 이름을 잊었어도, 그 선생님의 따뜻한 눈빛이 만들어낸 안도감은 당신 어딘가에 녹아 있다.
기억은 사라지지만, 그 기억이 조각한 당신은 사라지지 않는다.
4. 망각이 없다면 — 용서도 없다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자.
만약 인간이 아무것도 잊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까?
10년 전 상처, 5년 전 실수, 어제의 굴욕. 그것이 매일 동일한 선명함으로 재생된다면 — 사람은 아마 용서를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용서는 사실 기억이 흐려지는 동안 생겨나는 감정이다. 정확히 기억하는 동안, 우리는 용서보다 분노에 가깝다.
망각은 우리를 어제의 피해자로 고정시키지 않는다. 망각은 우리가 오늘의 사람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해주는 매일 아침의 작은 의례다.
기억을 붙잡는 것이 삶을 붙잡는 게 아닐 수도 있다.
흘려보내는 것도 살아가는 방식이다.
5. 마지막으로 — 당신이 이 글을 잊어도 괜찮다
이 글도 잊혀질 것이다. 읽는 동안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제목을, 논리를, 이 문장들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해도 된다.
다만 — 아주 작은 무언가가, 어딘가에 남기를. 이름 붙일 수 없는 어떤 감각으로.
그것이 기억이 작동하는 진짜 방식이고,
그것이 우리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조용한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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