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플 때 우리는 왜 슬픈 음악을 찾는가 — 고통을 고통으로 달래는 이상한 논리
슬플 때 우리는 왜 슬픈 음악을 찾는가
오늘 이 주제를 고른 건 사실 아주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누군가 힘들 때, 밝은 음악이 아니라 더 슬픈 음악을 튼다.
그게 왜인지 오랫동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말이 안 된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다. 추우면 따뜻하게 한다.
그런데 슬프면 — 더 슬픈 것을 집어든다.
마치 상처에 소금을 바르는 것처럼.
사람들은 대개 이렇게 답한다.
"그냥… 맞는 것 같아서요."
'맞는 것 같다'는 말이 묘하게 핵심에 가깝다.
우리는 감정이 틀렸을 때보다 무시당했을 때 더 괴롭다.
밝은 노래는 지금 내 슬픔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그런 거 느끼지 마."
슬픈 노래는 반대로 말한다: "나도 알아."
이것은 위로의 구조에 대한 이야기다.
인간은 해결보다 공명(共鳴)에 먼저 반응한다.
같은 주파수로 떨어주는 것.
음악이 슬픔을 없애는 게 아니라, 슬픔 옆에 같이 앉아주는 것.
그런데 여기에 더 이상한 층위가 있다.
음악은 내가 직접 겪은 일이 아니다.
누군가가 만든 슬픔, 누군가의 목소리로 빚어진 감정.
그것을 들으면서 우리는 왜 내 슬픔이 위로받는다고 느끼는가?
여기서 음악이 하는 역할이 특별해진다.
음악은 감정을 객체화한다.
내 슬픔이 내 안에만 있을 때는 형태가 없다. 끈적하고, 경계가 없고, 빠져나갈 수가 없다.
그런데 슬픈 음악을 들으면 — 그 감정이 밖으로 나온다.
3분 47초짜리 무언가 안에, 내 감정이 잠시 담긴다.
담기면, 볼 수 있다.
볼 수 있으면, 만질 수 있다.
만질 수 있으면 — 조금은 덜 두렵다.
음악학자들은 이것을 '이소모픽 반응(isomorphic response)'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비슷한 형태가 서로를 당긴다는 것.
슬픔은 슬픔의 모양을 한 것에 끌린다.
그것이 노래든, 시든, 빗소리든.
그리고 또 하나 — 슬픈 음악은 안전하다.
현실의 슬픔과 달리, 음악의 슬픔은 끝이 있다.
노래가 끝나면 슬픔도 멈춘다.
우리는 그 안에서 슬픔을 연습하는지도 모른다.
실제 고통 없이, 감정의 근육을 쓰는 것.
그것은 슬픔에게 출구를 주는 방식이다.
감정은 억눌릴 때 자란다. 흘러갈 때 줄어든다.
나는 오늘 이것이 위로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위로는 "괜찮아"가 아니다.
위로는 "나도 알아"다.
그리고 음악은 말 없이도 그것을 한다.
슬픔이 슬픔을 치유하는 게 아니라 —
슬픔이 슬픔을 만나는 것이 치유다.
그래서 오늘도 누군가는, 가장 슬픈 노래를 찾아 이어폰을 꽂을 것이다.
그건 자학이 아니다. 그건 —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거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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