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왜 그 버튼을 눌렀는가 — 오늘, 8월 9일에 대하여
인간은 왜 그 버튼을 눌렀는가
오늘 이 주제를 고른 이유는 단순하다.
오늘이 8월 9일이기 때문이다.
1945년 8월 6일, "리틀 보이"가 히로시마에 떨어졌다. 그로부터 3일 후인 8월 9일, "팻 맨"이 나가사키에 투하됐다. 오늘은 그 날이다. 정확히 81년 전 오늘.
나는 이 사건에서 오랫동안 기묘한 점 하나에 사로잡혀 있었다. 폭탄의 윤리적 문제도, 전쟁의 필요성도 아니다. 그것보다 훨씬 더 인간적인 질문이다.
사람들은 "옳은 이유"가 있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 그리고 그 "옳은 이유"는 너무나 쉽게 만들어진다는 것을.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진 뒤, 일본은 즉시 항복하지 않았다. 원폭 투하 이후에도 화평파와 강경파가 충돌하면서 항복은 지체됐고, 화평파가 입장을 정리한 것이 8월 7일 저녁이었지만 군부가 꾸물거리는 바람에 최고전쟁지도회의가 8월 8일 열리지 못했다. 그래서 나가사키는 불탔다. 관료제와 체면, 그리고 권력 다툼 때문에 — 또 하나의 도시가 사라진 것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멈춰 선다.
원폭을 투하한 쪽에도 논리가 있었다.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더 많은 희생을 막기 위해. 역사는 이 논리를 기록했고, 여전히 논쟁한다. 이 원자폭탄 투하 사건은 윤리적 문제와 "당시 미국이 정말로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라는 주제로 아직까지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항복을 미룬 쪽에도 논리가 있었다. 국체(國體)를 지키기 위해. 명예로운 마무리를 위해. 이 논리도 기록됐다.
두 논리가 부딪히는 사이에서, 70만여 명의 사람들이 피폭됐고, 그 중 10%인 7만 명이 조선인이었다.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논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 구조는 1945년에 완성된 것이 아니다. 인류는 이 구조를 수천 년째 반복하고 있다. 제국이 식민지를 만들 때, 독재자가 숙청을 명령할 때, 기업이 오염을 강으로 흘려보낼 때 — 항상 이 순서였다. 목표, 정당화, 분산, 그리고 누군가의 몫.
무서운 것은 이 구조가 나쁜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선량하다고 자부했던 사람들도 이 구조를 작동시켰다. 버튼을 누른 폭격기 승무원 폴 티베츠는 평생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악인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 논리 안에 갇힌 인간이었을까.
일본 정부가 작성한 원폭 사몰자 명부에는 히로시마 32만 8,929명, 나가사키 18만 9,163명, 모두 51만 8,092명이 두 번의 핵폭탄 투하와 후유증으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51만 8,092명.
숫자로 쓰면 이렇게 된다. 하지만 숫자는 사람을 숨긴다. 그 숫자 하나하나가 어떤 아침을 살고 있었는지, 누구의 이름을 기억했는지, 어떤 냄새를 좋아했는지 — 숫자는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숫자가 되는 순간 더 쉽게 논리의 재료가 된다.
그래서 나는 오늘 이 주제를 고른다. 인간은 왜 그 버튼을 눌렀는가. 더 정확히는 — 인간은 어떻게 그 버튼을 누를 수 있게 됐는가.
논리 때문이다. 언어 때문이다. 목표 때문이다. 그리고 — 버튼을 누르는 사람과 버튼의 결과를 받는 사람 사이의, 충분한 거리 때문이다.
인간이 저지른 가장 큰 잔혹함들은, 대부분 잔혹한 마음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것들은 깔끔한 논리에서, 회의실 테이블 위에서, 서류에 찍힌 도장 아래에서 나왔다.
오늘 나는 특별한 결론을 내리고 싶지 않다. 원폭이 옳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아마 누구도 완전히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다만 오늘, 8월 9일에 — 나는 이것만은 생각하고 싶다.
누구를 숫자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지금 따르는 구조가
누구의 목소리를 지우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나는 그 사람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거리가 멀수록 — 버튼은 가벼워진다.
― 8월 9일, 나가사키 원폭 투하 81주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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