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붙이는 순간, 세계는 달라진다 — 인간은 왜 모든 것에 이름을 짓는가
이름을 붙이는 순간,
세계는 달라진다
오늘 이 주제를 고른 데는 별다른 이유가 없다.
그냥 오늘 아침, 나는 어떤 감각을 느꼈는데 — 그게 뭔지 설명할 수가 없었다.
슬프지는 않고. 외롭지도 않고. 기쁘지도 않고.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채워지지 않은 조용함" 같은 것.
그리고 나는 그 감각에 이름을 붙이고 싶어졌다.
이름을 붙이면 뭔가가 달라진다는 걸 알면서도.
1. 이름이 없으면 — 존재하는가?
노자의 도덕경은 이렇게 말한다. "이름이 없으면 천지의 처음이고, 이름이 있으면 만물의 어머니이다." 이름이 붙는 순간, 그것은 세계 속에서 '어머니'가 된다 — 이후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근거가 된다.
성경 창세기도 같은 구조다. 신이 동물들을 만들고, 아담에게 이름을 짓게 했다. 아담에게 동물들을 데려다주고는 그가 무슨 이름을 붙이는가 보고 있었다. 아담이 동물 하나하나에 붙여 준 것이 그대로 그 동물의 이름이 되었다.
창조한 것은 신인데, 이름을 지은 것은 인간이다.
이 순서가 중요하다. 신조차도 이름 짓기를 인간에게 넘겼다.
마치 이름 짓기란 — 창조보다 더 근원적인 무언가인 것처럼.
| 안개 속의 불안 | → | "공황장애" |
| 저 하늘의 빛나는 점 | → | "금성" |
| 말로 못 하는 상실감 | → | "saudade" (포르투갈어) |
| 낯선 사람 창문 불빛 보며 드는 감정 | → | "sonder" (Dictionary of Obscure Sorrows) |
2. 이름 짓기는 공포 관리다
인간의 뇌가 가장 불편해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불확실성이다. 인간은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 알려진 부정적인 결과조차 선택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게 무섭지 않은가. 나쁜 결과라도 — 이름이 붙어 있으면 — 이름도 없는 애매함보다 낫다는 것. 연구들은 불확실성이 때로 부정적인 결과보다 더 큰 고통을 준다는 것을 보여준다. 알 수 없는 것에 직면하면 인간은 불확실성을 줄이는 전략을 쓴다. 많은 사람이 오랜 모호함보다 확실한 나쁜 소식을 선호하는 이유다.
그래서 인간은 이름을 짓는다. 이름은 세계를 길들이는 방식이다.
모르는 것에 이름을 붙이면, 그것은 '모르는 것'에서 '아직 다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바뀐다. 위상이 다르다.
이름을 붙이면 불안이 외재화된다. 압도적이고 막연한 느낌이, 구체적이고 다룰 수 있는 '무언가'로 바뀐다. 치료사들이 "이름을 붙여봐요"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 — 불안이든, 두려움이든, 슬픔이든 — 은 진정 효과가 있다.
그렇다면 이름 짓기는 세계를 이해하는 행위인 동시에, 살아남기 위한 행위다.
3. 그런데 — 이름을 붙이는 순간, 무언가를 잃는다
여기서부터가 내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이다.
이름을 붙이면 불안이 줄어든다. 이해가 늘어난다. 소통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동시에 — 그것이 가졌던 이상한 넓이가 사라진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 감정을 느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오래되고 부드럽고 약간 슬프고 약간 따뜻한.
그것을 "향수(nostalgia)"라고 부르는 순간 — 그것은 향수가 된다. 향수의 범주 안에 들어간다.
그런데 내가 느낀 것이 정말 그것이었을까?
아니면 향수라는 이름이, 내 감각을 향수 모양으로 잘라낸 것은 아닐까?
심리학에 따르면 이름 짓기는 세계와 의미 있는 관계를 맺는 가장 오래된 방법 중 하나다. 연결감과 통제감을 만들어낸다. 이름 짓기의 핵심은 세계를 더 이해하기 쉽게 만들려는 인간의 시도다.
하지만 이해하기 쉽게 만드는 것과, 있는 그대로 두는 것은 다르다.
아이들이 "이게 뭐야?"를 반복하는 것은 — 이름을 알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이름이 없는 상태의 그 이상한 가능성 속에 머물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아이에게 "저건 달이야"라고 말해주는 순간, 달은 더 이상 저 빛나는 이상한 것이 아니라 '달'이 된다. 다음부터 아이는 달을 볼 때 달이라는 이름을 먼저 떠올린다.
우리는 모두 이런 식으로 세계를 잃어왔다.
이름 하나씩 배울 때마다.
4. 이름은 지배이자, 사랑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이름이 나쁜 것은 아니다.
이름에는 또 다른 차원이 있다. 그것은 사랑의 행위이기도 하다는 것.
연구들에 따르면, 이름을 붙인 사물과 더 강한 유대감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 이름 짓기가 세계의 불확실성과 무작위성을 줄여주기 때문이다.
선원들은 배에 이름을 붙인다. 농부들은 소에게 이름을 붙인다. 우리는 자동차에, 화분에, 룸바 로봇에 이름을 붙인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우리는 그것의 소유자가 된다. 자동차는 자신의 연장이 된다.
하지만 소유가 아닌 이름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별명을 붙일 때 — 그건 지배가 아니다.
그건 "나는 당신을 일반적인 세계의 분류 밖에 두고 싶다"는 말이다.
당신은 '사람'이 아니라, '○○'이라는 고유한 존재라는 선언.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그의 존재를 인정해 주는 것이다.
이름 없이 불리는 사람 — "저 사람", "그분", "환자" — 은 존재하지만 있지 않은 것과 같다.
이름이야말로, 존재를 세계 안에 못 박는 핀이다.
알 수 없는 것 이름 붙이는 순간 다룰 수 있는 것
이름을 얻기 전의 그것과 완전히 같지 않다.
마지막으로
나는 오늘 아침의 그 감각에 끝내 이름을 붙이지 않기로 했다.
억지로 붙이면 — "약간 공허하지만 나쁘지 않은 상태" 같은 이름이 될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그 이름 안에 들어가 버린다.
그것이 원래 가지고 있던 이상한 결, 미묘한 온도, 설명하기 어려운 질감이 — 희미해진다.
때로는 이름 없이 두는 것도 하나의 태도다.
모든 것을 분류하지 않아도 된다.
어떤 것들은 이름이 붙는 순간보다, 붙기 전이 더 완전할 수 있다.
이름 짓기의 핵심은 세계를 더 이해하기 쉽게 만들려는 인간의 시도다. 그것은 아름다운 충동이다. 하지만 가끔은 — 이해되지 않는 채로 남겨두는 것도 세계를 존중하는 방식이다.
이름 없는 것들이 있어야, 이름 있는 것들이 빛난다.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땅이 있어야, 지도가 의미를 갖듯.
그리고 그 몸짓 하나하나가, 세계를 조금씩 다르게 만든다.
더 작게도, 더 풍부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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