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아무도 없을 때와 누군가 볼 때 다른 사람이 되는가 — 우리에게 '진짜 나'는 처음부터 없었다
우리는 왜 아무도 없을 때와
누군가 볼 때 다른 사람이 되는가
오늘 이 주제를 고른 이유는 단순하다.
나는 오늘, 혼자일 때의 나와 누군가를 마주할 때의 나가 얼마나 다른지 생각하게 됐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떤 표정을 짓는가.
냉장고 앞에서, 혼자 걷는 골목에서, 아무도 읽지 않을 메모를 쓸 때.
그때의 나는 — 진짜일까?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Erving Goffman)은 1956년 이렇게 말했다.
상호작용에서 관련된 사람들은 동시에 관객이자 배우가 될 수 있으며, 행위자들은 자신에 대한 좋은 인상을 심고 타인이 그 정의를 받아들이도록 유도한다.
쉽게 말하면: 우리는 매일, 매 순간, 무대 위에 서 있다.
그런데 이게 단순히 '위선'이나 '가식'의 문제가 아니다.
상대방에게 자신을 소개하거나 내보일 때 사람들은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자신의 불리한 점을 덜 드러내려 하고 좋은 점을 부각시키려는 행동을 하게 된다.
이건 선택이 아니라 거의 반사에 가깝다.
이러한 자기연출은 인간의 본능적 행위에 가깝다.
표정을 조율한다
'저 사람이 원하는 나'를 연기한다
목소리 톤이 달라진다
옷을 신경 쓴다
이상한 자세로 앉는다
아무도 웃기지 않을 걸 혼자 웃는다
멍하니 천장을 본다
'나'가 아닌 것처럼 존재한다
그렇다면 뒷무대가 '진짜 나'인가?
꼭 그렇지도 않다.
뒷무대에서조차 우리는 미래의 누군가에게 보이는 자신을 상상한다.
혼자 쓰는 일기도, 혼자 걸으며 중얼거리는 말도,
어딘가 가상의 관객을 두고 있다.
그들의 관심을 받기 위해 우리는 그들의 욕망을 욕망하고, 그들이 명문대 입학을 원하면 나도 명문대 입학을 원하게 된다. 그들이 단정한 외모를 원하면 나도 단정한 외모를 원한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헛갈린다.
'내가 원하는 것'인지 '내가 원한다고 믿게 된 것'인지.
그렇다면 '진짜 나'는 어디 있는가
내가 오늘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진짜 나'는 어딘가에 고정돼 있는 본질이 아니다.
오히려 수백 개의 '역할' 사이 어딘가에서, 매 순간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말한다:
"요즘 내가 너무 가식적인 것 같아."
"나 자신을 잃은 것 같아."
"진짜 나로 살고 싶어."
그 말이 나쁜 건 아니다. 하지만 그 말에 전제가 있다.
"어딘가에 원본이 있다"는 전제.
[진짜 나] ──────── 핵심 / 원본 / 본질
│
┌────┴──────────────────┐
│ 역할들 │
│ - 직장에서의 나 │
│ - 가족 앞의 나 │
│ - 친구들과의 나 │
│ - SNS 위의 나 │
└───────────────────────┘
역할 A ←── 관계 역할 B ←── 상황 역할 C ←── 기대 역할 D ←── 역사 역할 E ←── 두려움 ↑ ↑ ↑ ↑ ↑ 이것들이 서로 교차하는 지점에서 '나'라는 인상이 임시로 만들어진다
기대하는 타인의 시선에 실망을 주지 않으려 애쓰며, 자기 자신에게 집중할 여지를 갖지 못해 자신이 뜻있게 하고 싶은 것이 무언지 철학적인 질문들을 하지 못하고 살게 된다.
이게 문제의 핵심이다.
역할 연기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 —
내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을 때 문제가 생긴다.
우리는 누구나 남들의 기대에 따르는 행동을 하며 살지만, 그 비중이 너무 크면 겉으로 보이는 것, 즉 결과에 중점을 두어 실제의 나 자신과 갭이 생긴다.
그래서 오늘 나는 이걸 제안한다
'진짜 나를 찾겠다'는 목표를 내려놓는 것.
그 대신 이렇게 묻는 것:
"지금 내가 연기하는 이 역할은,
내가 선택한 것인가 — 아니면 떠넘겨진 것인가?"
아무도 역할 없이 살 수 없다.
하지만 역할을 선택하는 사람과 역할에 잠식되는 사람은 다르다.
전자는 무대 위에서도 무대 밖을 알고 있다.
후자는 뒷무대에서도 커튼이 내려있는지 모른다.
오늘 하루 내가 몇 번이나 다른 사람이 됐는지
문득 세어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에게 말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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